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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스토리] 다이애나 ㅣ (Diana : Her Fashion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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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25 02:44:53

           

다이애나, 그녀의 패션 스토리 (Diana : Her Fashion Story)
1991년 8월, 캐서린 워커의 드레스와 필립 소머빌의 모자를 착용한 다이애나

다이애나는 모든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때에도 멋진 옷을 입고 세상과 당당히 마주했습니다.

오늘 소개할 이야기는 사망 20주기를 맞아 켄싱턴 궁에서 열렸던 세계적인 패션 아이콘이자 개인적인 불행을 뛰어넘어 약자를 대변하는 아이콘으로 거듭난
고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의상 컬렉션입니다.


다이애나의 아버지는 고압적인 인물로 그녀가 아들이기를 바랐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말했다. 수줍음을 많이 타던 다이애나는 그런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을 거의 병적으로 목말라 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고 언니 새라가 한때 사귀었던 찰스 왕세자와 결혼을 결심한다.
하지만 그 선택은 그녀를 비극적인 동화 같은 삶으로 밀어 넣었다.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둔 찰스는 그녀를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Newsweek 기사 중 -


하지만 다이애나의 상징적 지위에는 그녀를 향한 숭배를 정당화하는 좀 더 실질적인 뭔가가 있다.
그녀는 잊혀진 사람들을 위해 과감하게 행동한 세자빈이었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약자를 대변한 왕족이었다.
무엇보다 다이애나는 그 일을 우아하고 품위 있게, 그리고 재치 넘치게 해냈다.
그녀는 자신을 침묵시키려는 왕실과 자신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긴 찰스 왕세자에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 Newsweek 기사 중 -

1989년 홍콩

다이애나는 패션계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 그녀에게 옷을 만들어 주려는 디자이너들이 줄을 섰다.
하지만 그녀는 남들이 입혀주는 대로 입는 인형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언제,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정확히 알았다.
그녀는 패션을 이용해 닫힌 문을 열고 다리를 놓으며 자신이 원하는 걸 얻어냈다.

- Newsweek 기사 중 -

1981년, 약혼 후 첫 공식 행사에서

“그녀는 패션의 언어를 직관적으로 이해했으며 그것을 사람들과 소통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도움을 주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 Diana : Her Fashion Story 큐레이터 엘러리 린 -

1990년 런던, 캐서린 워커의 드레스를 입은 모습

...

1981년 11월, 앤공주와 함께 국회 개막식에 가고 있는 다이애나

1981년 7월, 찰스 황세자와 다이애나의 세인트폴 대성당 결혼식 장면


발모럴에서의 허니문

다이애나, 1971년

유모차에 타고 있는 어린 다이내나

백악관에서 존 트라볼타와 함께 춤을 추고 있는 모습

1997년 자선 드레스 경매에서

다이애나가 입었던 80년대의 우아한 이브닝 드레스와 90년대의 파워수트

왕실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꿈꾸기 시작한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다이애나 비는 충격적인 죽음을 맞이합니다.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 친구 도디 알파예드와 함께 탄 차가 파파라치들과 추격전을 벌이던 중 사고가 발생해 두 사람은 현장에서 사망하고 만 것입니다.

당시 영국을 비롯한 전세계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았고, 영국의 타블로이드지는 그녀의 죽음에 대한 각종 루머를 연일 쏟아냈습니다.

당시 어린 왕자들과 국민들은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훗날 해리 왕자는 한 동안 왕실에서 어머니 얘기를 꺼내는 것이 금기시되었었다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남자친구 도디의 아버지이자 파리 리츠 호텔의 주인인 모하마드 알파예드는 의문의 사고라며 강하게 주장했죠.

그야말로 영국 국민들의 자랑거리였지만, 항상 언론의 주목을 받고 화제를 몰고 다니는 그녀에 대한 왕실의 우려는 매우 컸습니다.
특히, 찰스 왕세자와 이혼 후 자유롭게 연애를 즐기는 모습은 왕실의 심기를 무척 건드리는 일이었죠.

...

영국을 넘어 전세계 여자들의 패션 아이콘으로 떠오른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보그> 커버 모델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다이애나를 자주 촬영했던 마리오 테스티노는 단숨에 세계적인 사진가로 급부상합니다.

그녀의 상징인 파워 수트

밝고 활달한 성격만큼 예법에 구애받지 않는 현대적인 패션 또한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엄숙한 왕실 가족들과는 달리 평범하게 자라온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국민들에게 친근한 태도로 다가섰습니다.

1981년 찰스 왕세자와 결혼한 다이애나. 귀족 가문 출신이긴 하지만 평범한 집안에서 자랐고, 유치원 보모로 일하기도 했었죠.
그야말로 세기의 결혼, 신데렐라같은 왕세자비의 탄생이었습니다.

영국 국민들이 가장 사랑했던 왕실의 인물은 여왕도 왕자도 아닌 다름아닌 다이애나 왕세자비였습니다.

다이애나는 대중의 엄청난 관심 속에 살았기 때문에 친구를 고르는 데도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가 유명인사 게이 친구를 많이 뒀던 건 우연이 아니었던 듯하다.
팝 스타 조지 마이클, 그룹 퀸의 싱어 프레디 머큐리, 패션 디자이너 잔니 베르사체 등등. 다이애나는 성공한 유명인사이면서도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으로 사회에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그들의 고통을 공감했다.

그녀는 자신의 집사를 지낸 폴 버렐과 코미디언 케니 에버렛 등 성정체성으로 고통 받던 사람들을 포용했다.
 다이애나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도움을 주고자 했다. “고통 받는 사람은 누구든 내게 찾아오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들이 어디 있든 달려가겠다.”


1996년 다이애나가 런던 라이트하우스 에이즈 클리닉을 방문했을 때 그녀의 이런 마음이 가장 강력하고 감동적으로 드러났다.
에이즈는 동성애자 남성들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었다. 당시 에이즈에 걸린 남성은 친구와 가족, 동료와 조국으로부터 버림 받았다.

다이애나가 에이즈로 죽어가는 환자들의 손을 잡은 사진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면서 영국인은 그들이 주변의 도움이 절실한 마지막 순간에 버려져선 안 되며
사랑 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새삼 깨달았다.


또 다이애나가 사망하기 직전에 보여준 삶의 방식은 그녀를 숭배하던 소외계층에 좋은 교훈을 줬다.
그녀는 고통에 몸부림치다 술과 마약으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다. 마침내 모든 게 잘 돼가는 것처럼 보였을 때 우리 곁에서 갑자기 떠나갔다.
그녀가 그렇게 열심히 추구하던 해피엔딩은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다이애나는 끔찍한 이혼 과정을 극복하고 언론의 비방과 중상도 견뎌냈다.
세계의 억압적인 정권과 막강한 무기업계에 맞서 국제 인권운동계에서 존경 받는 인물이 됐다. 그리고 자신을 왕세자빈 시절보다 더 왕족처럼 느끼도록
해주는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이 모두가 그녀를 급변하는 시대의 게이 사회에 꼭 맞는 아이콘으로 만들어줬다. 다이애나는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때 좌절하지 않고
멋진 옷을 차려 입고 반항적인 미소로 세상과 당당히 마주했다.
사회의 수용과 평등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여왕 다이애나는 결코 왕관을 내려놓지 않을 것이다.

- Newsweek 기사 중 -



    Lady Di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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